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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중앙박물관 관람기 (2018년 3월 20일)

국립 중앙박물관을 가보고 싶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진흥왕 순수비와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을 보고 싶었고, 찾아보니 이 두 문화재가 중앙박물관에 있다고 하여 그곳을 찾은 것이다.

진흥왕 순수비는 얼마전에 오른 북한산의 비봉 꼭대기에 있는 것이 진흥왕 순수비 복제품이라고 하여 관심이 생겼고,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제주도 눌치재에서 본 만화책 신의 물방울에서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이 나왔고, 이 일본의 문화재가 미륵반가사유상과 비슷하여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들었다.

일본의 국보인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 만화 ‘신의 물방울’에서 거론되었다. (동아에서 퍼옴)

참고로 4호선 이촌역에서 내리면 쉽게 갈 수 있고, 상설 전시관은 입장료 없이 무료이다.

1월 1일, 설날(당일), 추석(당일)과, 4월과 11월의 첫번째 월요일은 휴관이며

오전 10시부터 보통 오후 6시(수요일과 토요일은 밤 9시)까지 개관하니 평일에도 충분히 관람을 할 수가 있다.

그리고 홈페이지가 잘 되어있어 직접 가지 않아도 많은 정보를 상세히 접할 수 있지만 유물은 직접 볼때 감흥이 큰지라 가보는것도 좋을 것 같다.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당신 멋진 폼을 잡았는데, 잘 안보여~~
박물관이어서 전통적인 모습을 담았으리라 생각할 수도 있는데 아주 현대적인 건물이다.

1층은 선사/고대관과 중/근세관으로 되어있고,

2층은 기증관과 서화관

3층은 아시아관과 조각/공예관으로 되어있다. (중앙박물관 홈페이지 참조)

참고로 백미인 반가사유상은 3층 불교조각실에 있다.

박물관 내에서 촬영은 허용되지만 플래쉬를 켜면 안된다.

구석기 시대의 주먹도끼 (연천 전곡리 주먹도끼). 참 절묘하게 깎여나갔다. 정말 전시 전용으로 쓰여도 좋을 만큼 아름답다.
한반도의 여러 지역에서 돌도끼가 출토되었나보다.
견과류를 가루로 만들거나, 곡물의 껍질을 벗기는데 사용된 갈판과 갈돌. 청동기 시대의 물건으로 보고 있다.
중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줄곳 들었던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토기
신석기 시대 무덤에서 나온 유골… 이런 유골을 보면 묘한 기분이 든다.
복원 모형인데 팔에 팔찌를 차고 있는 모습과 발을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희한하다. 여성이었나보다.
청동기 혹은 초기철기의 돌을 갈아서 만든 칼(검)이다. (간돌검)
청동기 동검(구리로 만든 검)이다. 국사 시간에 배운 비파형 동검도 보인다.
옹관묘 혹은 독무덤이라 한다.
심심해서 만들었을까? 청소년이 만들었을까? 재미있는 토기이다. 신라인의 하루라는 제목도 재미있다. 풋~하고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목구비와 표정이 생생히 담겨있다. 악기를 연주하는 것 같은 조각도 있다. 덩실덩실 팔을 벌려 춤을 춘다. 재미있다. 예술품도 좋지만 이런 작품이 더욱 신선하다.
생로병사를 표현했나? 남녀가 부둥켜안고있고, 여성이 출산을 한다. 여성의 가슴도 도드라져있다, 디테일이 살아있다. 하하…
문화재보다 이런 작품을 더 오래 보고 더 많이 사진 찍었다. 2000년 전의 개구리, 맹꽁이, 망둥어다. 역시 디테일이 살아있다. 하하…
2000년 전의 개가 나를 보고 웃는다. 하하하…
북한산 비봉에 있던 진흥왕 순수비 원본 앞에 섰다. 세월의 흐름에 깎이고 금가고 흐려졌다. 국보 3호이다.  조선시대에는 무학대사의 비로 알려져 있었는데, 1816년 금석학자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이 비를 조사한 후에 진흥왕순수비임을 밝혀내고, 그 내용을 비 왼쪽면에 기록해 놓았다.
옆면을 보면 김정희의 이름이 또렷이 새겨져있다. 추사 김정희도 우리나라 위인으로 추앙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6세기의 역사적 유물에 19세기 인물이 이렇게 이름을 새기다니 이건 문화재 훼손 아닌가?
진흥왕 순수비 뒷면. 우연히 찍히 저 아저씨의 묵묵한 뒷모습과 닮은 것 같아 느낌이 더 묘하다.
신라시대 (4세기 말 ~ 5세기 초 추정) 금관 (국보 191호). 조명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정말 찬란히 빛난다. 금은 정말 변하지 않는구나…
1층 로비에 있는 고려시대의 경천사 10층 석탑이다. 국보 86호로 ‘모든 불교의 존상을 모은 일종의 불교적 판테온’이라는 설명이 이 탑의 본질을 꿰뚫는 것 같다.
통일신라 시대의 철불이다. 고려 철불의 본이 되는 작품이라고 한다. 이마의 백호와 손목 등에 훼손이 안타깝다. 우리가 익히 보아온 석가모니불의 근엄하면서도 자애로운 모습과는 조금 상반된다.
발해 시대의 용머리상이다. 사람들이 코 부분만 많이 만졌는지 반질반질하고 까맣게 때가 타있다. 익살맞은 모습이 서양의 용(dragon)과는 느낌이 다르다. 집에 있으면 좋겠다. 🙂
따로 기록을 안하여 어떤 문화재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고려자기일 것이다. 차에 관심이 많은 요즘 이런 다기를 보면 참 탐이 난다. 🙂
선조들은 이런 것으로 차를 마시고, 물을 마시고, 술을 마셨단 말인가…?
호랑이인가보다. 아까 발해의 용처럼 무섭기보다는 친근하다. 눈이 부리부리하고 코는 뭉툭하고 길고 입은 넓적하니 볼수록 친근하다. 집에 있으면 참 든든할 것 같다. 🙂

박물관을 안가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박물관은 생각보다 넓고, 생각보다 볼 것이 많고, 생각보다 발이 아프다.

모든 것을 다 찬찬히 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고, 오늘의 백미인 반가사유상을 찾아 3층으로 올라간다. 3층에는 조각/공예관이 있어 불상들이 많이 모여있다.

반가사유상은 몇점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반가사유상은 두 점이다.

국보 78호와 83호.

국보 78호 반가사유상
국보 83호 반가사유상

안타깝게도 이 두 불상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그리 많지 않다. 석가모니 출가 전에 명상하는 것을 그린 것인지, 미래불인 미륵인지 의견이 분분하다고 한다. (태자사유상? 미륵사유상?)

그리고, 삼국시대라고 연대만 추측할 뿐 신라의 작품인지 백제의 작품인지도 명확하지 않다고 한다. 이유는 우리가 출토한 것이 아니라, 일본 도굴꾼이 도굴한 것을 후에 거액의 돈을 주고 구입했거나 기증 받았기 때문이다.

83호의 경우 일제강점기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 입수 기록에는 “국보 83호는 1912년 당시 이왕가(李王家) 박물관일본인 골동품상에게 2,600원(지금 돈으로 약 26억 원)을 주고 구입했다”고 적혀 있다.[4] 78호는 일본인 골동품상이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 총독에게 바쳤던 걸 총독이 조선총독부 박물관(지금의 국박) 기증한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이 출토된 지역이 어디냐에 대해 매우 논란이 많다. 백제 지역(충청도 지역)의 사람들은 자기네 지방에서 만든 것이었다고 주장하고, 신라 지역(경상도 지역)의 사람들은 자기네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 논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5]

  • 나무위키 인용 (링크)

그리고, 안타깝게도 박물관의 정책인지 두 점의 사유상을 동시 전시하지 않고 번갈아서 한 점만 전시한다고 한다.

나무위키에 의하면 ‘지치고 힘들 때마다 보러온다’는 매니아들도 있다고 한다.

반가사유상은 3층에서도 별도 공간에 특별히 자리잡고 있고, 얼핏 모르고 지나치기가 쉽게 되어있다.

그 안에 들어가면 삼매에 빠진 태자/미륵을 깨울까 싶어 나도 모르게 절로 침묵하게 된다.

발걸음도 조심조심 걷는다.

나 뿐만이 아니라 전 우주가 숨을 참고 고요속에 잠긴 것 같다.

사유상을 보자마자 내가 아내에게 한 말은 ‘끝내준다!’였다.

평일에 가서 사람도 없고, 사유상 앞에 의자도 있어 우리 부부는 그 의자에 앉아 호젓하게 한참을 하염없이 사유상을 보며 우리도 명상을 하고, 힐링을 하였다.

나이를 먹어서인지 전에는 관심도 없던 박물관, 문화재, 명상 등에 관심이 많이 간다.

박물관을 관람하며 계속 든 생각은 더 많은 문화재가 있을텐데 전쟁과 일제강점으로 인해 제대로 보존하고 보유하지 못한 점이 안타깝다는 것과 이런 보물들을 항상 곁에 두고 보기만 해도 행복하겠다는 것이었다.

박물관 절도범이 이런 심리로 훔쳐가는 것일까? 🙂

반가사유상은 정말 명불허전이었다. 우리나라 문화재 중에서 가장 마음이 쏠리는 명작이다.

정말 집에 하나쯤 들이고 싶어서 박물관 내의 기념품점에 있는 사유상 모형을 살까도 했는데 조잡함에 마음을 접었다.

국보 78호가 전시되면 다시 와서 또 감상해야겠다.

아니, 나도 78호이든, 83호이든 나도 반가사유상 매니아 클럽에 들어야겠다. 지치고 힘들때마다 와서 힐링하고 와야겠다.

시간 관계 상 박물관의 보물들을 절반도 못보고 돌아올 수 밖에 없었는데 다음을 다시 기약한다.

야외 전시품도 많으니 날 좋을 때 와서 밖을 거닐면서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기대보다 아주 충만했던 국립중앙박물관 관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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