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반, 이 세상에 키보드가 다양하게 있다는 것을 처음 인식했다. (키보드에 나의 관심사가 닿았다고 해야할까?)

당시 컴퓨터 사면 딸려오는 세진 키보드 말고도 다른 키보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일종의 유레카?)

그 키보드 종류에는 기계식 키보드라는 것이 있고, 그 기계식 키보드는 키를 누를 때의 소리가 예전 타자기처럼 찰칵찰칵하고, 소위 손가락 손맛도 다르다고 어디서 들은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대학에 입학했던 90년대 초반에 뉴튼 컴퓨터가 많은 인기였고, 당시 썼던 학교 전산실에서 키보드가 기계식 키보드였던 것 같다. (뉴튼 컴퓨터를 구입해서 쓰지는 않아서 정확하지는 않다.)

당시 회사 동료에게 키보드에 대해 물어보니 그 친구가 대뜸 ‘기계식 키보드는 아론이 유명하지!’ 라는 것이 아닌가. 나도 아론이라는 키보드 회사에 대해서는 들어본 것 같았고, 즉시 지름신이 강림하시었다. 

요즘도 마찬가지지만, 지름신이 오시면 구체적으로 어떤 지름신을 영접할 지 이리 조사하고, 저리 궁리하고, 요리 비교하고, 조리 끙끙댄다. (나이를 먹어도 이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당시가 2004년, 내 큰 아이가 태어난 해이고, 내 기억으로는 큰 아이가 태어나기 불과 며칠 전에 그 키보드가 집에 도착했다. (이와는 별개로 나는 당시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에 크게 흥분(?)한 상태였고, 앞으로 내게 금전적 투자가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과감함이 배가되었던 시기였던 것 같다. 기계식 키보드 외에 로망이었던 하만카돈 사운드스틱도 함께 질렀다~ 크~)

(후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큰 아이와 이 키보드는 내게 거의 동시에 왔고, 큰 아이는 이 키보드를 시샘(?)했는지, 결국 이 키보드의 운명에 결정타를 가하게 된다.)

아론 기계식 키보드는 내가 돈을 내고 (그것도 거금) 별도로 구입한 첫번째 기계식 키보드였다. (값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데 꽤 거금이었다.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키보드에 나름 거액의 돈을 투입한다는 것을 이해못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얼마 전 해피해킹 키보드 정리하다가 이것 말고도 내가 갖고 있는 키보드가 꽤 많구나 싶어서 여기저기 뒤져보니 이 아론 키보드도 나왔다. 커버를 씌워놓아서 먼지가 그리 많지는 않은데 표면이 끈적끈적하다. 찾아보니 이 키보드의 고질적 문제 중의 하나인데 표면의 우레탄 코팅이 녹아서 이렇게 끈적끈적하게 된다고 한다.

대충 손질을 하고 컴퓨터에 연결해본다. 연결 방식은 추억의(?) PS2 방식이다.

아론키보드 PS2 연결 방식. (표면이 지저분하다. 우레탄 코팅 녹음으로 인해 끈적끈적하고 먼지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당시 홍보포인트였던 아론 키보드의 찬란한 LED 컬러

현재 아론테크는 망했는지 홈페이지는 들어가지지 않는다. 내가 산 키보드는 2004년 산이고, 모델은 A106S+ 이며 Made in Korea 였다.

아론키보드와 해피해킹 크기 비교. 엄청나게 크다. 당시에는 왜 이리 크게 만들었을까… 기술 문제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 나는 동선이 작은 미니키보드를 선호한다.

생각해보자. 이 키보드를 받고 얼마나 기분이 좋았을까?

벌써 17년전이다. (아들도 17살이 되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당시 나는 키보드보다 하만카돈 사운드스틱을 먼저 개봉하고, 컴퓨터에 연결했다. 당시까지 최고로 알고 쓰던 저가형 사운드 블러스터 스피커는 저 멀리 치워버리고 사운드 스틱을 연결했다. Winamp을 이용했는지, JetAudio를 이용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당시에는 iTunes는 없었다. (적어도 내게는 없었다.)

생생히 기억한다. 랜덤으로 곡을 골랐는데, 처음으로 흘러나왔던 노래는 빅마마의 거부였다.

정말 신났고, 기분이 좋았다. 빅마마의 후련한 목소리와 시원한 빵빠레가 그동안 들었던 음과는 다른 음량과 박진감으로 흘러나온 것이다.

어느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는 노래를 틀어놓고 몸을 음악에 맡겨 흐느적거리며 키보드를 꺼내서 컴퓨터에 장착했다.

키보드에 손을 올리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박자에 맞춰 키를 눌러보니 또다른 화음이 발생한다. 비록 불협화음이었지만 내겐 멜로디로 들렸다. ‘짤깍짤깍’…

아~~ 이게 기계식 키보드구나… 이런 느낌이구나… 이렇게 타자기와 같은 느낌이 컴퓨터 키보드에서도 나올 수 있구나 싶었다. 

아론 키보드 알프스 유사 회축

우레탄 코팅 처리가 되어있는데 그게 녹아 끈적끈적하다 (건강에는 문제 없나?). 엔터키는 돌린 ㄱ 타입이다. 백스페이스가 내 기준에는 너무 작다.

키보드 세상에서 알프스라는 회사는 과거의 영광이었다. 현재는 키보드 스위치는 생산하지 않는다고 하고, 영광과 명성은 체리라는 회사에 넘어갔다. (체리 청축, 갈축, 흑축, 백축 등 스위치가 유명하다.)

기계식 키보드 스위치 방식을 클릭, 넌클릭, 리니어 등으로 분류한다.

클릭은 그야말로 클릭(찰칵, 딸깍)하는 걸리는 느낌과 소리가 난다. 소리도 크게 난다. 내 기준으로 손맛보다는 소리에 중점이 있다.

리니어는 그야말로 부드럽게 나아간다. 걸리는 게 없다. 소리가 크지 않지만 대부분 키압이 높다. 즉, 손에 압력이 좀 강하게 느껴진다. (이게 매력이다.)

넌클릭은 클릭과 리니어의 중간이다.  소리와 손맛을 둘 다 잡고자 한다.

내가 산 아론 키보드는 알프스 유사 회축을 탑재한 클릭형 기계식 키보드이다. 아론 키보드 이후에 써본 다른 어떤 클릭 키보드 못지 않게 짤깍하는 소리가 높고 뚜렷하다. 손에 걸리는 느낌도 또렷하다.

종종 어떤 키보드가 가장 좋은 키보드냐 라는 질문을 보기도 한다. 혹은 이 키보드가 더 좋냐, 저 키보드가 더 좋냐를 비교하기도 한다. 혹은 내게 이 키보드가 맞냐, 저 키보드가 맞냐를 문의하기도 한다.

키보드는 짬뽕 vs 짜장면처럼 취향의 영역이다. 본인한테 맞는게 최고의 키보드인 것이다.

내게 아론 키보드는…???

Caps Lock은 전통적인 위치에 있고, 모양에 차별화를 두었다.

그리 많은 정보 없이 영접한 나의 최초의 거금투입 기계식 클릭형 키보드인 아론키보드는 첫째, 내 취향에 맞지 않았고, 두번째로 내 상황에 맞지 않았다.

아론 키보드와는 오래 함께 있기는 했지만 곁에 두고 늘 함께 할 사이는 아니었던 것이다.

처음에 이 키보드와 내 큰 아이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내게 왔다고 얘기했다. 갓난아이와 기계식 키보드라… 이게 적합한 조합이라고는 아무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산후 조리를 하고, 아이와 산모가 집으로 돌아오고는 그 키보드를 칠 수가 없었다.

아이가 자는 옆에서 그 요란시끌벅적한 기계식 키보드를 칠 수 있는 아빠는 세상에 없지 않을까?

그래도 새로 영접한, 최초의 기계식 키보드인데 너무 홀대한다 싶을때면 골방에 가서 또각또각 눌러보기도 했지만 이 물건은 그렇게 쓰라고 만든 물건은 아니다.

그러면 회사에서 쓰는 방안도 있겠지만, 회사에서 민폐인 물건 중의 하나는 클릭형 기계식 키보드이다. 같이 일하는 공간에서 짤깍짤깍 소리는 처음에는 신기함에 호기심을 보일 수는 있어도 얼마안있어서 클레임이 들어올 것이다.

이런 소리 문제가 하나였는데 그보다 더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으니, 이 키보드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클릭형이라는게 문제라고 할수는 없는데 뭔가 종합적으로 그리 맘에 들지 않았다. 소리, 손에 걸리는 느낌, 손가락에 느껴지는 반발력, 키보드의 크기, 모양, 손가락에 닿는 표면의 느낌, 자판 배치 등 종합적인 느낌이 그닥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이상하다… 좋은거라고 하는데 난 좀 별로네… 왜 이렇지…? 많이 쓰지 않아서 그런가 라며 틈나는 대로 써보았지마 역시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았고, 정도 들지 않았다.

내가 바란 키보드의 느낌은 보다 쫀득하고, 손가락에 달라붙고, 적당히 탄력있고 우아하게 손가락 끝을 밀어주는 느낌이 있어야하는데, 내게 이 키보드는 전체적으로 너무 ‘경박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그리 많이 이 키보드를 활용하지 않았는데 약 6개월 후에 이 키보드를 봉인하게 된 결정적인 일이 발생했다.

스페이스바의 길이는 그리 길지 않다. 현재 다른 것은 모두 다 정상적으로 동작하지만 이 스페이스바는 동작하지 않는다.

큰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모유를 먹으며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고, 잘 웃으며 매일매일 부쩍부쩍 자랐다.

아이가 손을 움직이고, 무엇이든 만질 때 나는 아이를 내 의자에 앉혀서 (물론 내가 옆에서 안은 상태로) 책상 위의 키보드를 두드려보게 했다. 그냥 아이가 그걸 누를 때 나는 소리를 인지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게 아빠로서 즐거웠던 것이다.

아이는 키보드를 탕탕 치기도 했다. 다른 사람이 그랬으면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치거나 못하게 했겠지만 내 아이가 그러는데 그깟 키보드가 대수냐, 고장만 내지 마라, 아니 고장이 나도 어쩌겠냐, 설마 고장이야 나겠어 라며 흐뭇한 마음으로 옆에서 지켜보는 것을 넘어 두드림을 적극 지원(?)해주었다.

아이는 신나서 키보드를 치기도 하고, 두드리기도 하고, 누르기도 하다가 갑자기 힘이 들었는지, 뭐가 불편했는지 키보드 위에다 왈칵 젖을 토해놓았다. 🙁

키보드 한 복판에 토한 것은 아니고 아래쪽, 즉 스페이스바 쪽에 토했다. 

상황은 급했다. 아이는 혼자서 몸을 지탱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고 위치도 의자라서, 아내에게 맡겨야하는 상황이다. 아이를 안고 입으로는 아내를 부르며 키보드 위를 보니 아이가 토한 젖은 키보드 자판 사이로 여유작작하지만 확실하게 스며,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마음은 급하다. 아내는 왜 이리 오지 않나. 아이는 토해서 속이 편한지 아니면 아빠의 애장품에 본인의 자취를 남긴게 즐거운지, 아니면 자기와 함께 이 집에 온 라이벌(?)을 응징해서 통쾌한지 어쨌든 아이는 신난다고 몸을 흔들며 까르르 웃고 있었다.

아이를 아내에게 안전하게 맡기고 부랴부랴 키보드를 본체에서 분리해서 뒤집어 젖을 흘려보내고 휴지로 닦고, 키캡을 분리해서 닦고, 문질렀다.

하지만, 몇개 키가 잘 눌리지 않는다. 눌려도 키감이 전과 다르다. 균일하게 자연스레 눌리던 대로 눌려야하는데 이질감이 느껴지는 키가 몇 있다. 

드라이기로 말리고, 선풍기로 말려도 보았지만 별 차도가 없다.

그렇게 이 비운의 키보드는 약 16년동안 어느 구석에 봉인되었다가 얼마전에 다시 세상에 나왔다.

이 블로그 포스팅을 남기는 것이 이 키보드의 사명이었나 보다.

16년만에 다시 만져본 이 키보드는 우레탄 코팅이 녹아서 좀 끈적거리고 지저분한 것을 제외하면 큰 이상은 없다. 전에 이질감이 느껴지던 키들도 이제는 거의 차이를 느낄 수 없다. 딱 한가지 안 되는 점은 스페이스바가 동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주된 키보드여서 상대적으로 만족도가 높지 않았다면 지금은 다른 키보드들과는 다른 매력과 느낌을 내게 주는 독특한 키보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스페이스는 동작하지 않지만 가끔 두드려보면 독특한 키감과 소리로 색다른 즐거움을 준다. 언제 틈나면 스페이스바도 고쳐봐야겠다.

이렇게 시작된 키보드 앓이는 계속되어 이제는 중고 물품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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