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걷기여행 2017] 3일차 (곽지과물해변 -> 한림항)
날짜: 2017년 7월 12일 (수요일)
비좁은 텐트 안이었지만 아주 꿀잠을 자고 일어났다. 어제 하루종일 그렇게 걷고 잠들었으니 얼마나 달콤한 잠이었겠는가…
게다가 파도소리와 모래사장 옆 풀밭의 푹신함 등 제주의 자연이 주는 포근함은 전날의 피곤을 말끔히 해소해주었다.
발바닥에 부담을 분산시키기 위해 등산스틱을 이용하기로 했다. 길이 계속 아스팔트여서 걸을때마다 스틱이 딱딱하고 부딪혀서 기분좋은 소리가 나지는 않겠지만 어쩌겠는가 발이 너무 아프니 어쩔 수가 없다.
영등별감: 바다에 물고기 씨를 뿌려주는 어부들의 영등이다. 별감은 무장이라 창과 방채를 가지고 바다에 불어오는 대풍을 창으로 찌르고 방패로 막으며 배를 단속한다. 그러나 화가 나면 폭풍을 몰고 와 배를 부수는 풍랑의 신이기도 하다. 그러나 15일 제주를 떠날 때는 영등달의 금승을 풀어주는 배방선의 신이다.
영등할망은 영등달인 음력 2월 1일에 한림읍 귀덕리로 입도하여 2월 15일 우도를 통해 제주를 떠난다. 제주에 머무는 동안 섬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소라와 전복·미역 등 해산물을 증식시켜 주며, 어로 일반까지 보호해 준다고 하여 해녀와 어부들이 중심이 되어 영등굿을 치른다. (신화 위키 인용)
여러 번 언급하지만 발 상태가 정말 안좋았고, 점점 더 안좋아지고 있다. 그래도 걸으면 아픈 것에 익숙해져서 터벅터벅 계속 걷게 된다, 속도는 아주 느리지만…
동행 게스트하우스를 지나자마자 바다쪽으로 좀 들어간 정자가 있었다. 제주 해안도로를 따라서 걷다보면 이런 정자가 자주 있어 주민들과 여행자들의 휴식처가 되어준다. 날도 덥고 다리도 아파 그 정자로 들어가 배낭을 풀고 양말도 벗고 배낭에 기대어 편히 쉬었다. 쉬다보니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자다보니 이 동네 사시는 할머니께서 정자에 들어오셔서 마늘을 까신다. 한동안 자다 일어나니 할머니께서 말을 거신다.
”이 더운 날 그 무거운 배낭을 메고 다니오?”
잠시후에 할아버지도 오셔서 별 말씀없이 바다를 보고 계시고, 할머니는 이런저런 말씀을 해주셨다.
예전에는 사람도 별로 없고 한적한 동네였는데 요즘 사람이 너무 많아져서 많이 복잡해졌다는 말씀도 하고, 저 옆에 있는 게스트 하우스도 서울 사람들이 와서 하는데 사람이 많이 묵는다는 얘기도 하시고…
협재까지 갈 예정이라는 말에 협재는 관광지가 되어서 물가가 비싸니 한림에서 먹는게 싸고 맛있을거라는 말씀과, 지난 길에 있는 해녀들이 직접 하는 식당이 싱싱하고 값도 싼데 거기서 먹었으면 좋았을거라고 안타까워하기도 하셨다.
할머니도 해녀이셨고 현재 연세가 81세라고 하셨는데 내 눈에는 한 65세 정도로 보여서 말씀드렸더니 싫지 않으신지 환하게 웃으신다.
그러다가 내 부르튼 발을 보시곤 걸어서 그렇게 된거냐고 그러면 탈난다고 밴드라도 붙여야한다고, 밴드 없냐고 하신다.
방만했던 나의 이번 여행. 밴드나 비상약은 갖고 오지 않아서 없었다. 가다가 필요하면 약국에서 사지 뭐~ 라는 생각으로 왔는데 약국이 보이지 않는다.
할머니께선 바다를 보고 계신 할아버지를 향해 “영감~ 집에 가면 나 전에 팔 데었을때 붙였던 커다란 밴드 있소. 어여 그것 좀 가져오소~” 라고 말씀하신다.
가만히 계시던 할아버지는 얼덜결에 요청을 받아 집으로 들어가셨다. 할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한참이 지나도 할아버지는 오시지 않는다.
할머니 왈. ”이 영감~ 그것 못찾는가보망~~”
한참이 지나 할아버지께서 오셨고 손에는 대일밴드 두개가 들려있었다.
할머니께선 그걸 보시곤 갑자기 소리를 지르시며 ”할아방~ 그거 말고 나 팔에 붙였던 두툼한 거 있다 하지 않았나? 이걸 갖다가 어떻게 하노? 이거 말고 그거 가지고 온나!”
할아버지는 한참을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하셨고, 내가 ”아니에요~ 그걸로도 충분해요. 감사합니다~”라고 해서 중재(?)가 되었다.
이틀 후에도 버스에서 제주도 분들의 또다른 일화가 있는데, 갑자기 불 붙는 듯이 확 오르는 뜨거운 기를 느낄 수 있었다. 🙂
밴드를 감사히 받고 푹 쉬었으니 이제 다시 기운을 추려 짐을 지고 일어난다.
할머니 할아버지 사진이라도 찍었으면 좋았을텐데 그럴 정신이 없었다. 아쉽다.
정자를 나와 계속 아스팔트로 되어있는 올레길을 걷는다.
산에 갈때에는 손톱 발톱도 깎아서 무게를 줄이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는 산은 아니지만 배낭을 메고 다니니 그 말을 적용해야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것도 하지 않았다. 발바닥도 아프지만 발가락이 신발 앞에 계속 부딪혀 자극을 받아 아팠고, 긴 발톱 때문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편의점에서 손톱깎기를 산다고 했다가 자꾸 잊었다. 방법이 없을까 했는데 갖고 있던 스위스 아미 나이프에 작은 가위가 있는 것이 생각나 그걸로 자극 받는 발톱을 깎았다. 🙂
아까 정자에서 할머니가 주신 대일밴드를 하나씩 왼발, 오른발바닥에 붙였다. 그거라도 붙이니 그래도 고통이 좀 덜하고 걸을 때 마찰이 덜 전달되어 조금이나마 편했다. (참고로 제주는 약국이 곳곳에 많이 있지 않다.)
터덜터덜 걷는데 정말 날이 덥다. 어제 비가 올때가 걷기에 훨씬 편했다. 제주로 출발할 때와 첫날은 비가 많이 오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이젠 날이 너무 더워 걱정을 하고 있다. 가다가 음악이 나오길래 보니 화장실이었다. 음악이 없었으면 모르고 지나칠 뻔 했다. 그곳에 들러 물도 빼내고 세수도 하고, 모자도 물에 적셔 쓰니 훨씬 시원하다. 거기서 잠시 더 걸으니 한림항이 나왔다.
완전 땡볕에서 터벅터벅 걷는데 점심시간이 지났다. 발바닥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고, 배는 고프고, 날씨는 덥고 체력적으로 많이 방전이 되었다. 시원한 물회를 한사발 먹으면 좋겠는데 마땅한 식당이 보이지 않는다. 항구 근처인데 회집은 잘 보이지 않고 고기집, 찌게집이 주로 보였다. 조금 더 가다보니 골목 안쪽에 장어집 간판이 보이는데 메뉴에 물회가 있다. 일단 들어간다.
내가 좋아하는 물회. 그것도 제주에 왔으니 자리물회를 먹어줘야지. 지난달에 왔을때에도 자리물회를 먹었었지. 그때도 참 맛있게 먹었는데 그때와 비교하면 어떨까…? 자리물회 1인분을 주문한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눌치재 쥔장들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 곽지에 있고 협재로 해수욕하러 가는데 같이 가지 않겠냐고…
내가 제주를 걷고 있고, 어제 곽지에서 잤고, 발 상태도 안좋은 것을 알고 겸사겸사 신경써서 이런 스케쥴을 잡은 것 같다. 고맙게 오지랍도 넓은 사람들 같으니…
지금 음식 주문해서 좀 시간 좀 걸릴 것 같다고, 점심 안먹었으면 와서 같이 먹자고 하니 밥은 아니지만 점심은 이미 먹었단다. 위치를 찍어 보내고 식사 후에 이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다.
물회가 나왔다. 사진이고 뭐고 후다닥 덤벼 먹고 싶지만 그래도 이성을 챙겨서 사진 한방 찍는다.
식사하고 밖으로 나가니 눌치재 쥔장들이 도착해 있어 반갑게 만났다. 이렇게 반갑다니… 🙂
오늘 걷기 일정은 이렇게 마감되고 이제부터는 차를 타고 이동해서 해수욕을 한다! 시원한 에어콘이 나오는 자동차라니~~ 캬~~ 시원하고 편하고 빠르구나~~
협재로 갔으나 주차장은 만원이고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바로 옆에 있는 금릉해변으로 갔다. 거기도 협재만큼은 아니나 사람들이 많았으나 운좋게 바로 주차장에 차가 빠져서 그 자리에 차를 세우고 해변으로 간다~. 나는 절름거리면서…
가져간 타프를 이제야 제대로 써먹는구나. 이렇게 쓰려고 타프를 가져왔구나. 모래사장에 타프를 치고 그 안에 자리를 잡았다. 🙂
전에 가족 여행 때 협재에서 해수욕을 해봤지만 여기 금능도 물색이 참 예쁘고, 물이 깊지 않아 아이들도 함께 해수욕을 하기 참 좋다. 지척에 비양도를 두고, 바다에 누워 파도에 나를 맡기고 새파란 하늘을 바라보니 정말 세상 부러울 게 없다. 이렇게 편하고 행복할 수가…
고행을 하러 온 여행도 아닌데, 이 더위에 계속 걷기만 했으면 이 즐거움을 몰랐을 것이다. 그저께에는 해수탕, 어제는 곽지 용천수, 오늘은 금능 해수욕… 절로 너무 좋다,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게 해준 상쾌함들이었다.
눌치재 쥔장들과 함께 한참을 해수욕을 하고 밖으로 나와 타프 그늘 속에서 닭강정과 맥주도 마시다가 이후에 어떻게 할까를 정했다.
내 발 상태가 너무 안좋아서 약국으로 가서 약을 사고, 저녁을 먹고, 눌치재로 가기로 했다. 아쉽지만 나의 걷기 일정은 아까 한림항까지로 마무리된 것이다. 힝… (방만한 준비가 가져온 결과이다.)
금능 근처에 약국이 없어 협재로 갔지만 거기에도 문 연 약국이 없어서 한림항까지 갔다. 발에 붙이는 메디폼과 연고를 사서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간다. 장소는 ‘체면’으로 금능, 협재, 한림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식사 후에 어두운 밤길을 뚫고 그 멀리 눌치재까지 나를 데려다주었다. 객이 집을 차지하고, 주인은 다시 다른 집으로 돌아가는 이 뒤바뀐 상황이란…
눌치재 쥔장들 보시게나~~. 덕분에 오늘 즐겁고 행복했던 경험을 했고, 저녁도 아주 맛있었네. 내 몸 불편한 것 챙겨서 시간 낸 것 알고있네, 이곳을 빌어 다시 고맙다고 말하고 싶으이. (이걸 볼지는… ^^;;;)
지날 달에 가족과 함께 편안히 지냈던 눌치재에 다시 혼자와있으니 기분이 묘하군.
금능에서 씻은 것으로 되었고, 양치만 하고 피곤한 몸을 눌치재 평상에 뉘여 하루를 마무리한다.
오늘도 참 길고 의미있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