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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홀로 제주] 3일차 – 한라산 등반 (2020년 2월 6일)

겨울 제주는 별로 기억이 없다.

대부분 봄이나 여름에 다녀왔다. 2018년에 어승생악에 올랐을 때 눈이 많았는데 그때도 절기상으로는 3월이었다. 2020년 2월 제주 여행은 거의 최초의 겨울 제주 여행이고, 이 며칠 전에는 눈도 내려서 한라산에는 눈이 많이 쌓여있다. 돌이 많은 한라산이라 초반에는 아이젠을 차지 않았지만 얼마 걷지 않아 쌓인 눈이 많아져 바로 아이젠을 장착한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등산할 때 4월초까지는 항상 아이젠을 갖고 다니는게 여러모로 좋다. 산의 그늘진 곳에는 그때까지 눈이 녹지 않아 얼음인 채로 있는 곳이 꽤 있어 유의해야한다.)

한라산을 오르며 보면 제주에 유명한 조릿대가 지천에 널려있고, 이는 한라산 등산을 내륙의 다른 산과 구별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된다.

걸을 수록 풍경이 바뀌고 숨이 조금씩 가빠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이 맛에 산에 오른다.

관음사 코스에서 오르다보면 처음 인상깊게 만나게 되는 계곡이다.

젖소가 생각나는 현무암과 눈의 조합

산은 사계절이 다 좋지만 겨울산은 참 독특하게 좋다. 공기는 차갑고 머리는 뜨겁고… 그 상쾌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겨울 온천과 비슷한 느낌이지만 그보다 더 상쾌하다.

관음사 코스로는 한번 등산을 해봐서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은데, 삼각봉 나올때까지는 전망도 없고 힘든 곳도 없고 그냥 완만하게 계속 올랐던 것 같다. 사람들은 관음사 코스로 올랐다가 관음사 코스로 내려왔다고 하면 참 힘들고 긴 코스를 어떻게 다녀왔냐고 하는데 내 경험으로는 설악산이 훨씬 힘들고, 지리산이 더 길고 어렵다. 한라산은 산이 크고 높아서 그렇지 전체적으로 경사가 완만하여 그리 힘들지 않다. 다만 산장도 없고, 야영이 안되기에 당일 산행으로 마무리해야하기에 마음이 좀 급한 것 뿐이나 여유있게 출발하고 페이스를 유지하면 큰 무리없이 산행을 할 수 있다.

어느정도 가다보면 처음으로 높은 계단이 나온다. 이제부터 한라산 제대로 등산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산을 오르다가 어느 어르신과 잠깐 같이 가게 되었다. 어느신께서는 의사를 하시다가 이제는 퇴임하시고 여유롭게 지내신다는데 연세가 부모님과 비슷하시다. 양가 부모님께서 한라산에 오르신다는 것은 상상을 할 수 없기에 그 분의 건강과 취미가 참 부러웠다. 작년엔가는 히말라야 트레킹도 다녀오셨다는 등산과 걷기 매니아이셨다. 이번에도 한라산 등산을 위해 전날 저녁 비행기로 내려와서 오늘 등산하고 저녁 비행기로 올라가는 짧은 일정이라고 하신다.

두런두런 얘기를 하다가 안전하고 즐거운 산행을 서로 기원하며 각자의 페이스로 산을 오른다. 대피소 등에서 다시 뵐 줄 알았는데 다시 뵙지는 못했다.

그동안의 경험에 의하면 1,000미터와 1,500미터를 기점으로 산세나 난이도가 차이가 나는 것 같다. 보통 1000미터면 꽤 높다고 생각하는데 한라산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도 들머리인 관음사 탐방지원센터가 꽤 높은 곳에 위치하기 때문일 것이다. 전망도 없이 터덜터덜 걷다보니 어느새인가 1000미터를 넘어서 1200미터이다.

1000미터를 넘으니 눈이 더욱 깊게 쌓여있고, 겨울왕국이 펼쳐져있다. 렛잇고! 인투디언노운?

처음 관음사 코스로 올랐을때 사전 정보 없이 터덜터덜 오르다가 어느 순간 눈이 확 트여지는 순간이 나왔는데 그곳이 바로 삼각봉 대피소가 있는 곳이다. 사실 조금 지칠 때이고 지겨워지는 순간에 때마침 하늘과 함께 대피소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이번에도 삼각봉은 뜻하지 않은 반가움으로 다가왔다.

숲속에 있다가 갑자기 시야가 트이며 눈앞에 뭔가가 펼쳐진다.

갑자기 드러나는 삼각봉이다. 이 앞에 대피소가 있다.

전에 아들과 왔을때에는 낙석으로 인해 이 이상 갈 수가 없었는데 그것도 벌써 옛날일이고 이제는 출입이 자유롭다. 다만, 계절에 따라 특정시간때까지 이곳을 통과하지 못하면 추가 진행을 할 수 없어서 주의해야한다.

삼각봉 대피소에서 뒤를 돌아본다. 눈과 구별이 되지 않는 구름이 눈 아래에 놓여있다.

삼각봉 대피소. 왠지 이국적이고, 왠지 동화적이다. 예쁘다. 깨끗하다.

대피소 안에 들어가 싸온 김밥과 간식을 먹으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휴식을 취한다. 

글을 쓰는 지금은 2020년 12월 30일인데 등산을 하던 2020년 2월 초만 해도 평소에, 특히 등산 시에 마스크를 쓰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마스크 없이도 좁은 대피소 안에서 서로 인사를 나누고 음식을 먹던 그 때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꼭 돌아가야한다. 휴…

참으로 대칭적인 모습으로 인상적인 삼각봉을 눈에 담고 대피소를 지나 계속 나아간다. 대피소를 지나면서 등산의 난이도가 급격히 올라간다.

제대로 겨울을 보고 느끼고 만끽한다. 겨울 산행이 이토록 좋을 줄은 미처 몰랐어요.

용진각 현수교이다. 예전 기억으로는 이 다리 초입에 약수가 흘러서 물을 마시고 담아갔었는데 없어진 것인지 그냥 지나쳐 못 본 것인지 기억이 없다. 이 다리를 지나면서 정말로 난이도가 급격히 올라간다.

한라산 정상에 가까워질 수록 왕관바위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난다. 저 안 쪽에 백록담이 있는 것이다. 이제 정상이 얼마 남지 않았다.

눈에 덮인 ‘추억 속의 용진간 대피소 안내판’. 용진각 대피소는 1974년에 돌로 지어진 튼튼한 대피소였는데, 2007년 태풍 ‘나리’가 휩쓸었을 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전후의 모습은 당시의 뉴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뉴스 링크)

거의 마지막 깔딱 고개를 넘으면 갑자기 능선이 펼쳐지고 이제 거의 다 도착했음을 느낄 수 있다. 날은 화창하고 빛이 눈에 반사되어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다. 오늘 아주 제대로 겨울 산행을 만끽한다.

돌아보니 제주시가 멀리 펼쳐져있다. 최근 들어 가장 화창한 날인 것 같다. 어제는 한파에 바람도 많이 불었는데, 날 선택을 잘 한 것 같다. 우리 가족이 여행을 가면 항상 비가 왔는데 그게 나 때문이 아니라 아내 때문인 것 같다. (비를 몰고 다니는 아내?)

백록담이 있는 분화구 안쪽이 조금씩 보인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기쁘다, 기뻐…

구름이 있는 저쪽은 성판악쪽이다. 많은 분들이 그쪽에서 올라오고, 내려가고 계셨다.

한라산 BAC 100대 명산 탐방 인증! 지금 사진을 보니 저렇게 마스크를 쓰지 않고 찍은 사진 참 낯설다. 벌써 이렇게 되다니…

한라산 인증 포인트는 두군데… BAC는 거꾸로 들고 찍었군… 좀 알려주시지… 쩝…

순백의 백록담이 눈 앞에 펼쳐져있는데 왠지 비현실적이다.

성판악 쪽의 구름이 무시무시하다. 이 구름을 뚫고 내려가야한다.

우리나라 국립공원, 도립공원은 안전을 이유로 음주를 금하고 있는데, 이게 산 전체에서 무조건 금주가 아니라 지정한 위치에 한해서이다. (물론 이에 상관없이 본인의 판단하에 위험할 것 같으면 마시면 안된다.) 음주가 불가한 지역은 국립공원 홈페이지에 공표가 되어있고, 그 지역에 가면 플래카드로 금주를 안내하고 있다. (국립공원 홈페이지 공지 링크)

결론적으로 말하면 한라산에서는 음주가 허용된다. 아마도 벼랑이나 암벽 같은 위험한 지형이 없어서 그럴 것이다. 

오늘을 위해 미리 국립공원 홈페이지 등을 살펴봤고, 금주 지역이 아니기에 어제 먹다 남은 제주 막걸리를 배낭에 잘 챙겨와서 한라산 정상에서 김밥, 귤과 함께 아주 맛나게 마셨다. 🙂

한 편에서 많은 분들이 컵라면, 사발면을 드시던데 참 부러웠다. 이 추운 날, 산 정상에서 사발면처럼 맛있는 게 있을까? 이렇게 산에서 라면을 드시는 분들을 볼 때마다 사발면 회사(농X, 삼X, 오뚜X)는 절대 안 망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스위스 융프라우 전망대에서도 사발면을 파는 것은 아실 것이다. 한국인이 얼마나 많이 갔고, 그 곳에서 먹었을까. 참고로 전에 융프라우에 갔을 때 보니 그곳에서는 사발면 값 따로, 물 값 따로, 젓가락값 따로 받고 있었다. 대단하다.)

맛있는 점심을 간단히 먹고, 아쉽지만 땀이 식기 전에 하산을 한다. 원래 자동차를 갖고 왔다면 출발했던 관음사 코스로 다시 내려갔겠지만 차가 없어 선택이 자유로우니 한번도 안 걸어본 성판악 코스로 내려가기로 한다.

성판악 코스로 내려간다.

성판악 코스에 대한 평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전혀 힘들지 않고 완만하며 볼 것도 없어서 재미가 없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

위 내용은 오를 때의 얘기이고, 내려갈 때에는 쉬워도 너무 쉽다. 한번도 올라가는 경우도 없고 가파른 경사도 없다. 그냥 계속해서, 끊임없이 평탄하게 내려가면 된다. 시야도 없다, 그냥 길만 보고 내려가면 된다. 대신 나무가 많아 산림욕은 잘 될 것이다. (이건 어느 산이나 마찬가지?)

겨울왕국이다. 내가 비스듬히 찍은 것인가, 나무가 비스듬히 서 있는 것인가?

한참을 내려오니 진달래밭 대피소가 나온다. 이곳에서 물을 빼주고 잠시 쉬었다가 간다. 이쯤 왔으면 거의 다 온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아직도 한참 남았다. 이곳이 위치가 해발 1200미터도 넘는다.

걷다보니 수종이 바뀌어 풍경이 조금 바뀌었다.

내려오면서 렌터카 업체와 통화를 해서 타이어 펑크를 얘기하니 타이어는 보험처리가 안되고 자기 부담으로 수리를 해야한단다. 음… 자동차 정비업체에 전화를 해서 숙소에서 만나 수리할 시간을 정한다.

이제 해발 1,000미터를 지난다. 성판악 코스는 조금 길다. 조금 질린다.

드디어 성판악 날머리에 도착한다. 이때 시간이 14시 16분으로 하산에 2시간 16분 걸렸다.

성판악 지소에서 정상 인증샷을 보여주면 천원에 등정 인증서를 발급받을 수 있다.

 

 

  • 08:00 – 출발 (관음사 탐방대피소)
  • 09:32 – 1,200미터 지점 통과
  • 10:14 – 삼각봉 대피소 도착
  • 10:26 – 현수교 통과
  • 10:32 – 용진각 대피소 위치 통과
  • 11:25 – 한라산 정상 도착 (등산 3시간 25분 소요)
  • 12:00 – 하산 시작 (성판악 방향)
  • 12:35 – 진달래밭 대피소 도착
  • 14:16 – 성판악 날머리 도착 (하산 2시간 16분 소요)

참고를 위해 사진에 기록된 정보를 참고하여 소요 시간을 기록해본다.

정리하면 관음사 코스로 등산할 때 정상까지 대략 3시간 30분 정도 걸리고, 성판악 코스로 하산할 때 대략 2시간 20분 정도 소요되어 중간에 쉬는 시간 포함해서 7시간을 잡으면 충분한 것 같다.

버스를 기다려 타고 서귀포 올레시장 근처에서 내린다.

오늘 묵을 곳은 절물 자연휴양림의 숲속의 집으로 한라산 중턱에 있는 곳이라 주변에 상가도 없을테니 올레시장에서 내일 아침 끼니까지 이것저것 구입한다. 힘들게 등산을 한 나를 위한 선물로 제주 대방어 회도 한 접시 사서 어제 묵었던 숙소로 돌아온다.

낮에 보니 왜 바람이 빠졌는지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 아마 어제 노을을 보기위해 네비게이션이 잘못 안내했던 선착장에서 이 나사를 밟은 것 같다. 첫날 김희선 몸국도 그렇고 네비게이션에 불만족스럽다. 고객 대응도 그렇고 이번 렌터카 업체는 전체적으로 좀 아니로소이다. (역시 싼 이유가 있었어.)

정비업체에서 렉커차가 와서 간단히 타이어 수선하고 바람을 넣어주고 출장비와 수선비로 몇만원을 받아갔다. 음… 아깝네…

어쨌든 잘 수선이 되었고 오늘 등산도 잘 마쳤으니 잘 되었다. 차량에 몸을 싣고 아까 버스로 왔던 코스를 다시 되짚어서 성판악을 지나 절물자연휴양림으로 간다.

절물 자연휴양림의 소개 및 풍경은 다음 포스팅에서 하기로 하고 일단 이날은 편히 쉬고, 지금 글 쓰는 것도 마무리 모드로 가자. 🙂

갖고 있는 모든 먹거리를 꺼내서 찍어본다. 내일 퇴실 전까지 먹을 것들이다. 올레시장에서 산 대방어 회가 아주 맛있어보인다.

등산으로 지친 몸을 뜨끈한 물로 녹여주고 식탁에 음식을 챙겨서 제대로 포식한다. 산 정상에서 군침을 흘리며 먹지 못했던 사발면도 준비하여 김밥, 회와 같이 먹는다. 회에는 술이 필요한데 독주 대신 간단히 맥주를 마신다. 이보다 산해진미가 어디있겠는가…

지금 봐도 참 맛있어보이고, 참 맛있었다.

아침에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모든게 잘 마무리된 보람찬 하루였다.

보일러를 따뜻하게 설정하고 뜨끈한 온돌 바닥에서 하루를 돌아보며 알찬 하루를 마무리한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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