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 필사 – 6일차 (2018년 1월 31일)

지난 1월 26일부터 시작한 태백산맥 필사.

저녁 식사 후에 내 책상에 진지하게 앉아 30분에서 1시간 정도 필사를 한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아내는 소리내어 웃는다. 🙂

글씨를 쓰며 참 여러가지 생각도 나고, 나중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글씨에만 집중하게 된다. 일종의 명상이나 참선과 비슷한 것 같다.

처음에 원고지에 필사를 하며 의문이었던 것은 띄어쓰기와 그외 규칙들에 대한 것이었다. 첫칸을 띄어써야하나? 마침표 다음에 새로운 문장을 시작할 때 띄어써야하나, 그냥 붙여써야하나? 말 줄임을 의미하는 점 6개는 어떻게 써야하지? 원고지 한칸에 다 써야하나? 숫자는 한칸에 써야하나? 등…

초등학교 저학년 때 다 배우고 익혔던 것인데 벌써 수십년(헉…)동안 전혀 접하지 않았던 것이라 다 잊어버렸고 가물가물 헛갈린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면 여러가지 경우에 대한 안내가 상세히 펼쳐져 그런 것을 하나 찾아 숙지해가며 필사를 하고 있다.

필사를 하며 여러가지 생각이 난다.

아~~맞아. 예전에도 글씨를 쓰면 이렇게 손가락에 볼펜자국이 잡히고 이 부분이 움푹 들어가 아팠었지.

초등학교 때 글씨 연습한다고 글씨 잘쓰는 친구 글자체 따라 쓰곤 했었지.

초등학교 1학년 선생님이 글씨를 참 잘 쓰셔서 그 선생님 글씨를 따라 연습하곤 했었는데, 그 선생님은 현재 어디 계실까? 살아는 계실까? (당시 40이 넘어보였으니 지금쯤…. 음…)

예전에 그림일기도 쓰고, 교과서 옮겨쓰기도 하고, 글짓기도 독후감도 많이 했었는데 그것들 다 어디에 있지? 본가의 다락문을 열어보면 그 안에 있으려나? 초등학교 때 처음으로 받은 연애편지( 🙂 )는 어디에 있지? 내가 어디 깊숙한 곳에 숨겼었나?

원고지와 받아쓰기, 혹은 옮겨쓰기에 대한 기억과 추억은 다 초등학교 시절의 것이다. 중학교를 들어가면서부터 원고지를 사용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필사를 하며 내 글씨와 글자 쓰는 습관을 곰곰히 보게 된다. 이응(ㅇ)을 잽싸게 쓰려는 경향이 있어 대체로 글자가 작다. 이응(ㅇ)이 아니라 점으로 보인다. 리을(ㄹ)을 또박또박쓰지 않고 흘겨서 이어쓴다. 잘쓰면 멋들어지는 글자가 리을(ㄹ)인데 멋들어지기가 어렵다. 니은(ㄴ)은 초성과 종성에 따라 모양이 다르다. 모양이 다른게 잘못된 것은 아닌데 둘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렸을때부터 느꼈던 것인에 쌍비읍(ㅃ)은 쓰기가 참 번거롭다. 가운데 겹치는 부분을 겹쳐써도 마음에 들지 않고, 띄어쓰면 글자가 예쁘지 않다. 획수가 많아 쓰기가 쉽지도 않다.

못쓰는 글씨이지만 그나마 큼지막한 원고지에 한자한자 또박또박 쓰니 그나마 좀 낫다. 원고지가 아닌 일반 노트에 쓸 경우에는 또박또박 한글자씩 쓰는게 아니라 흘겨쓰며 한꺼번에 써서 나만이 알아 볼 수 있는 글자가 된다. 글자를 쓰는 장이 어디냐에 따라 글자가 명확히 달라지는 것도 희안하다. 글자가 달라지는 것은 종이 뿐만이 아니라 펜의 종류에 따라서도 달라지는 것 같다.

이번 필사를 위해 만년필을 하나 샀다. 뭐 사실 필사에 만년필이 필수는 아닌데 전부터 만년필에 대한 동경은 있었고, 전에 라미 만년필을 사서 썼었는데 오래 써서 이제는 잉크가 줄줄 새나와 새로운 것을 찾고 있던 중에 필사를 핑계(?)로 잽싸게 좋은 것으로 하나 구입했다. 일체유심조라 했지만 경지가 미천하여 그게 되지 않는 것 같다. 일반 펜을 손에 들때와 비싸게 주고 산 맘에 들어하는 만년필을 손에 들때는 마음가짐이 다른 것 같다. (이 역시 일체유심조의 한 예시인가?) 만년필을 잡고 원고지 앞에 앉으면 일단 마음이 차분해지고 진중해진다. 글자를 흘겨쓰지 않고 따박따박 한획, 한획 공들여 쓴다. 태백산맥 책의 글자는 작고 한 장에 문장도 많아 신경을 집중하지 않으면 다른 줄로 엉뚱하게 옮겨가기가 쉽다. 신경을 놓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런지 글자가 그나마 좀 봐줄만 하다. 일반 펜의 묻어나는 잉크 느낌이 아닌 약간 흘러나오는 만년필의 느낌이 좋다. 펜의 두께는 EF(Extra Fine)으로 내가 딱 좋아하는 두께로 선이 나온다. 만년필이 종이위를 지나면서 나는 그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너무도 자극적이다. 

태백산맥은 원고지 1만6천500매의 대하소설이다. 이번에 구입한 원고지는 200자 60매이다. 16500/60=275로 이만큼의 원고지 권수가 필요하다. 이미 필사를 완료하신 분 사진을 보면 원고지가 산처럼 쌓여있다.

독자기증 소설 태백산맥 필사본
연합뉴스에서 퍼옴 (링크)

필사를 해보기 전에는 200자 원고지가 얼마나 글을 담을 수 있는지 몰랐다. 태백산맥이 얼마나 빽빽이 글을 담고 있는지 몰랐다. 필사를 하면서 원고지는 술술 넘어간다. 책의 페이지는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원고지 5매를 꼬박 채우면 책 한 페이지를 다 쓰게 된다. 이만큼 쓰는데 40분 정도 걸리는 것 같다. 책 한페이지를 쓰는데, 어찌보면 읽는데 40분이 걸리는 것이다. 지독한 완독이다. 이렇게 보면 그동안 독서를 너무 후딱후딱 빨리빨리 했던 것 아닌가 싶기도하다.

빨간색 테두리만큼이 원고지 1매의 양이다.

한 페이지를 다 써서 책 장을 넘길때면 뭔가 성취를 한 것처럼 기분이 상쾌해진다. 어제까지 5일동안 저녁마다 조금씩 필사를 했는데 이제 겨우 8쪽 반을 썼다. 원고지로는 43매.

언제 필사를 다하지 싶으며 까마득하게 느껴지는데 전혀 마음 급할 것 없고, 급하지 않다. 필사를 하며 추억에 잠기고, 명상에 잠기고, 책 속으로 여행을 떠나고, 글씨도 살피고 내 마음도 살피고, 사각하는 글씨 지나가는 소리에 쾌감도 느끼고, 만년필 잉크가 번지는 그 느낌도 즐길 시간이 길게길게 남았다는 인식에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독서의 효용이 여럿있다고 하는데 필사라는 독서의 종류가 있고, 태백산맥 필사를 알게해 준 독서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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