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걷기여행 2017] 들어가며…
교만함의 결과가 어떻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 여행이었다.
확실히 여행은 많은 것을 선사하고 가르쳐주는 선생님과 같다.
6개월 동안의 잠실 프로젝트가 끝나고 내 몸과 마음은 휴식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회사는 사람을 놀리지 않는 법. 바로 일주일 후에 새로운 프로젝트가 급박하게 진행될 예정이라고 하고 내게 주어줄 수 있는 자유 시간은 일주일 밖에 없었다. (7월 10일 ~ 14일)
하지만 참 애매한 시기의, 애매한 일주일이었다.
전국이 축축한 장마 시즌이고, 아이들은 아직 방학을 하지 않았고, 나는 여행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어디로 갈지, 무엇을 위해 갈지, 무슨 준비를 해야할지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게다가 7월 8일 ~ 9일 주말은 산음 자연휴양림 통나무집 성수기 추첨 당첨이 되어 본가 식구 가족 여행이 예정되어있고, 7월 10일은 정기적으로 받는 병원 진료가 있고, 7월 15일 ~ 16일 주말은 가평으로 처가 식구들과 함께 가족 여행을 예약해놓았다.
휴가를 내서 리프레쉬를 해야할까? 아니면 사정이 맞지 않으니 휴가를 내지 말고 그냥 업무를 지속했다가 후에 휴가를 몰아쓸까?
효율을 보자면 후자가 맞겠지만 그러기에 나는 너무 피곤했고 이 상태로 또 정신없이 프로젝트를 진행할 기운이 없었고 전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찌할지 아내와 상의를 해봐도 똑부러지는 결론은 나지 않았고 그건 아내를 포함하여 나 아닌 타인에게 결정을 떠넘길게 아니라 전적으로 내가 결정을 내려야 할 사항이었다.
어찌되었든, 리프레쉬를 위한 휴가원은 제출했다. 그 휴가를 집에서 빈둥거리며 보낼지라도…
마음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특별한 결정 없이 주말 본가 식구들과의 가족 여행을 갔다. (산음 자연휴양림)
산음 자연휴양림을 다녀 온 일요일 저녁(7월 9일)에도 별 계획을 잡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아내가 한마디 해주었다. 제주도라도 훌쩍 다녀오라고…
작년 쿵스레덴 여행 이후로 나도, 아내도, 아이들도 더욱 강해졌다. 🙂
제주도 가족여행을 다녀온 지 한달 밖에 되지 않았는데 제주도를 또 가라고?
2014년 제주 배낭여행은 내게 최고의 여행 중 하나로 자리잡혀 있다. (후에 그 여행기도 기록에 남길 예정이다.)
그때처럼 제주의 속살을 나 홀로 만끽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에는 관음사 야영장, 한라산 정상, 절물 자연휴양림, 우도 위주로 여행을 했는데 이번에는 전에 아들과 함께 했던 이호테우 해변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올레길을 걸어야겠다고 대략적인 여행 계획을 잡았다.
이 점에서 아내와 내 생각에 차이가 있었는데 아내는 걷기 여행을 하더라도 옷가지만 챙겨서 가볍게 걷다가 게스트 하우스 등에서 묵고 식사는 주로 사서 먹는 여행을 제안한 것이고, 나는 배낭 안에 텐트, 버너, 코펠 등을 다 가지고 다니는 보다 철저한 배낭여행을 생각했고 내 고집을 아내가 꺾을 수는 없었다.
2014년 제주 배낭여행도 이런 여행이었고, 2016년 스웨덴 쿵스레덴도 이런 여행이어서 생각보다 힘들지 않다는 내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부랴부랴 비행기를 예약하는 것은 정확히 말하면 7월 10일 월요일 새벽 1시 30분 경에 이루어졌다. (비행기는 당일인 월요일 오후 2시 40분 출발)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비행기를 예매하는 것은 여행에 대한 결정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예약을 하면 소위 못먹어도 고! 인 상태가 되는 것이다.
만능인 새벽형 인간답게 여행 당일 아침 일찍 일어나 배낭 짐을 쌌다.
지난 달에도 다녀온 제주도… 우리나라 최대의 섬, 우리나라 최고의 관광지… 오지인 스웨덴 쿵스레덴에 비하면 같은 배낭 여행일지라도 뭐 하나 부족할 것도 걱정할 것도 없는 완전 럭셔리 여행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에 어느 순간인지 교만함이 자리잡은 것이었다.
배낭에 넣을 짐 목록을 보지 않아도 쌀 수 있을 정도로 이런 배낭 여행은 익숙하다고 생각했지만 목록을 보면서 하나씩 짐을 쌌다. 머리속으로 하나하나 다시 시물레이션을 하기도 했다. 의식주와 돈만 챙기면 큰 문제는 없다. 필수만 챙기면 나머지는 없어도 그만이다.
짐을 싸면서 스웨덴 쿵스레덴이나 제주도 올레길이나 짐의 양에는 전혀 차이가 없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짐을 챙겨놓고 오전에 병원을 다녀왔다. 오랜 가뭄에 단비가 내리는 월요일 오전이었다.
아내는 이 무거운 짐을 보곤 혀를 차면서 가벼운 여행으로 가는 건 어떠냐고 재차 제안을 했지만 내가 간단히 거부했다. 이게 진정한 여행의 맛이라면서… 🙂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걷지만 어느 순간엔가 그 배낭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물아일체감을 다시 느끼고 싶었고, 철썩철썩하는 해변의 파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고 일어나는 그 몽환적 상쾌함을 다시 접하고 싶었고, 밤에 해변에서 어두운 지평선을 마주하고 앉아 끓여먹는 라면의 맛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점심으로 아내가 해준 매콤한 제육볶음을 맛있게 먹고는 집 앞의 12시 15분 공항버스를 타기 위해 배낭을 메고 등산화 끈을 매었다. 이 등산화도 역시 쿵스레덴까지 신고 다녀온 그 등산화이다.
아내의 아프지 말고 안전하게 여행 잘하고 리프레쉬 잘 하고 오라는 인사를 뒤로 하고 집을 나섰다.
아까는 쏟아지던 비가 잦아들어 한두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 없이 혼자하는 여행이라 미안해서인가? 어제까지만 해도 예정에 없던 갑작스러운 여행이어서인가?
집을 떠났음에도 가시지 않는 이 막연한 불안감은 뭐지?
이런 여행 한두번도 아닌데 이 불안감은 뭐지?
머리로는 인식하지 못해도 마음의 소리는 내게 불안함으로 경고를 해주었던 것 같다.
중요한 것을 빼먹었어~~ 이 상태로는 제대로 여행을 할 수가 없어~~ 쿵스레덴과 올레길은 서로 달라~~ 아직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재정비를 하는게 어때???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이려는 것처럼 아내의 말을 다시 잘 새겨듣는게 어때???
이미 출발했으니 괜한 불안일거야~~ 라며 재차 마음을 추스리며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길을 걸어 공항가는 버스 타는 곳으로 간다.
이렇게 나의 생고생 제주 올레길 배낭 여행이 시작되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마음의 소리와 마눌님 잔소리는 언제나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