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여행 2017] 눌치재 (訥治齋)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
이번 제주도 여행에서 어디가 가장 좋았어?
내 예상에는…
- 환상적인 하늘과 바다를 보여주었던 표선 해변
- 곧게 곧게 뻗은 삼나무, 편백나무가 가득하여 절로 힐링이 되었던 사려니 숲
- 청명한 날씨에 너무도 또렷이 보였던 성산일출봉
- 정말 맛있게 먹었던 여러 제주의 식당이나 카페
들 중 하나나 여럿을 얘기할 줄 알았다.
그랬더니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외쳤다.
집!
우리 가족이 나흘동안 머물렀던 집이 가장 좋았단다.
그 곳의 이름은 ‘눌치재’이다.
눌치재 (訥治齋) – 말 더듬을 눌, 고칠 치. 말이 어눌하고 과묵한 이들도 대화가 술술 풀리는 공간
이라고 하는데 또다른 의미로는 이곳 쥔장 내외의 반려동물인 크눌프와 펀치의 이름에서 하나씩 딴 것이라고도… 🙂
대화가 술술 풀리는 이 눌치재는 펜션이나 게스트하우스가 아니다.
대학 후배 커플 (유셰프와 엄국장)의 전문 주방 겸 별장인 곳이다.
이곳 쥔장 내외는 벌써 이십여년 전에 학교에서 처음봤고 같이 생활하면서 봤을때부터 범상치 않은 사람들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멋진 공간까지 만들고 꿈을 가꿔가는 모습을 보며 감탄을 했다.
검색을 해보니 눌치재에 대한 몇몇 정보가 있다.
전에(2014년) 제주도 나홀로 배낭여행을 왔을 때 일기예보에도 없던 태풍이 갑자기 발생하여 완전 거지꼴로 이 후배들의 집에 방문하여 하루 신세를 진 적이 있다. 그날 늦게까지 술과 안주로 파티를 벌였었고 그 다음날 아침도 맛깔나는 메뉴로 식사하고 다시 여행을 했었다. 엄청난 안주와 식사와 술이 끊임없이 연이어 나오는데 그게 후배인 유셰프의 작품이었다. 그때까지 몰랐던 후배의 새로운 면모였다. 요리를 하는 것도, 먹는 것도, 남이 먹는 것도 좋아하고, 사람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얘기하고 어울리기를 즐기다가 본격적으로 전문 ‘주방’을 지은 것이다. 유셰프는 현재 제주도에 있는 모 IT기업에 다니는데 들리는 말로는 그곳의 서태지라나 성시경이라나… ??? ㅋㅋㅋ
유셰프의 반쪽인 엄국장(학교때 동아리와 연관)은 자칭 뒷처리 담당이라며 요리 이후의 주로 치우고 닦고 정리가 본인의 몫이라고 각자의 역할 분담을 얘기한다. 엄국장은 현재 외국소설 (아마 영문소설?) 전문 번역가로서 올해인 2017년 초에는 일년에 한번, 전국에서 한명에게 주는 최고 번역가상을 받은 실력가이다.
둘다 술 좋아하고 맛난거 좋아하고 어울리기 좋아하는 사람들로 이들을 만난지도 벌써 23년이 지났다.
미리 눌치재의 주소, 이용 방법 등을 자세히 안내받고 밤에 찾아가는데, 제주도는 수도권처럼 밤에 밝지가 않아 길가임에도 불구하고 위치를 한번에 찾지는 못했다.
아이들도 우리가 묵을 곳이 호텔이나 펜션도 아니고 게스트하우스도 아니고 학교 후배 커플이 지은 집이라고 들어서 그리 기대(?)를 하지 않았고, 네비게이션은 이 근처라고 하는데 길은 어둡고 근처에는 죄다 불꺼진 집들만 있어서 나중에는 기대는 커녕 폐가(?), 흉가(?)만 아니면 좋겠다는 바램 아닌 바램을 말하기도 했다.
2015년 여름에 아들과 둘이서만 배낭메고 제주도 걷기여행을 한 적이 있는데 첫날 우리가 묵은 곳은 ‘이호테우’ 해변이었다. 나는 분명 ‘이호테우’ 라고 말했는데 아들은 ‘이호텔’로 생각했다가 호텔은 커녕 해변에서의 야영이라 기겁을 한 적이 있어 이번에도 더욱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보곤했었다.
주변을 두바퀴 돌고 드디어 눌치재를 찾았다.
아내와 아이들이 먼저 후배가 알려준 비번을 누르고 집안에 들어가 불을 켜는 동안 나는 마당에 렌터카 주차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울려퍼지는 소리…
‘우와~~~’
아내와 아이들의 탄성이 터져나왔다.
무슨 일인가 하여 나도 서둘러 들어가보았다. 내 입에서도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폐가(?), 흉가(?)를 예상하던 아이들의 눈에 비친 눌치재의 모습은 이러했다.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아이들에게 이 책들이 여기 아줌마(^^)가 직접 번역해서 만드신 책이야~ 라고 알려주니 깜짝 놀라며 역시 환성을 지른다.
아빠 후배들 대단하시다~~
응… 내 후배들이야~~ 🙂
사진에는 담지 못했는데 엄국장이 사랑하는 라디오가 위쪽에 있다. 전에 함께 캠핑했을때에도 가져왔던 인상적인 티볼리 PAL 라디오. 이 라디오를 보고 뽐뿌받아 나도 티볼리 원을 구입해서 아내에게 선물했고, 그 라디오는 아내의 매일 친구가 되었다.
벽면의 시계도 범상치 않다. 음계로 표시되어있다. 시간이 되면 그 음계에 해당하는 바흐의 평균율이 흘러나온다. 🙂
이 집으로 인해 아침마다 여행에 차질이 생겼다. 아들이 만화책을 매일 새벽 2시 넘어까지 보다가 잠이 드는 것이다. 그것도 스스로 잔 것도 아니고 우리가 그만 자자고 말해서 겨우 불끄고 누운 것이다. 아들은 매일 늦잠을 잤다.
원래 밖에서 아침을 사 먹을 생각이었는데 그때 마침 엄국장이 이런 문자를 보냈다.
”형수님이 업소용 렌지를 써보셨나요? ㅎㅎ 라면도 맛있게 끓여지는데…”
라면도 맛있게 끓여지는데…
맛있게 끓여지는데…
맛있게 끓여지는데…
이 문자로 인해 갑자기 라면이 급 땡기고, 이 업소용 렌지의 엄청난 화력으로 끓인 라면 맛을 안보면 안되겠다 싶어 바로 차에 시동걸고 나가서 마트에서 라면을 사왔다.
바로 엄국장에게 아래처럼 문자를 보냈다.
이 터무니없는 사람들… 집안에 이런 화력이라니… 라면 언급에 급 땡겨서 바로 끓임. 라면맛 짱!!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쥐포를 구워서 맥주 안주로 먹었다.
정말 소잡는 칼로 닭잡는다는 말처럼 쥐포를 구웠다.
눌치재 쥔장 말에 의하면 이곳에 머문 사람 중에 저 불을 켜서 요리를 한 사람들은 우리 식구가 유일하단다.
원래 여행 중에 하루 쯤은 식재료를 사와서 여기 쥔장과 함께 눌치재에서 직접 요리를 해서 거하게 먹고 마시려했는데 일정이 조금 애매하여 그냥 만나서 외식으로 대신하고 말아서 아쉬웠다.
턱걸이를 하기 위해 근처에 철봉이 있는 곳이 있냐는 질문에 엄국장은 근처 초등학교를 말해줬고, 마당에 철봉을 놓아야겠다는 계획을 들었다.
이곳에 오면 그걸 이용할 사람중의 하나가 나일테니 나도 그 철봉 기금에 후원하겠다고 했다. (꼭 알려주삼~)
3박 4일동안 편안하고 아늑한 보금자리였던 눌치재.
우리 가족, 특히 아이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이 된 눌치재를 기억한다.
이런 멋진 공간을 흔쾌히 제공해준 멋진 유셰프 & 엄국장 커플에게 이곳을 빌어 감사 인사를 전한다.